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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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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 무라카미 하루키, 가와카미 미에코 p145 이를테면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애독하고 존 레넌을 사살했던 사람이 있죠.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이야기는 생물입니다. 우리는 생물을 만드는 거예요. 어떤 때는 그 생물이 인간 내부의 어두운 부분을 건드려 깨우기도 합니다. 무섭다면 무서운 일이죠. 하지만 그 사건이 샐린저 탓은 아니에요. p238 전에도 말했듯이 소설 쓰는 일은 일종의 신용거래고, 한번 잃어버린 신용을 되찾기는 매우 어려워요. 시간을 들여 '이 사람이 쓴 거니 돈 내고 사서 읽어보자'라는 신용을 쌓아나가고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문장을 정성껏 갈고닦는 일이 중요해요. 구두를 닦거나, 셔츠 다림질을 하거나, 칼날을 가는 것처럼. p306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기란 때로 매우 힘겹습니다. 독자의 입장과 작가의 입장은 꽤 ..
[책 이야기] 기사단장 죽이기 2 - 무라카미 하루키 p12 '연습이지. 연습하다보면 갈수록 실력이 늘어." "하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잘 못 그리는 사람도 많잖아요." 맞는 말이다. 나는 미대 시절, 아무리 연습해도 실력이 전혀 늘지 않는 동기를 수도 없이 봤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사람은 처음부터 타고난 것에 크게 좌우된다. 그러나 그런 말을 꺼내면 이야기를 수습하기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연습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는 아니야. 어떤 재능이나 자질은 연습하지 않으면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거든." p24 "오늘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네요." 마리에가 말했다. "그런 날도 있어." 내가 말했다. "시간이 빼앗아가는 게 있는가 하면 시간이 가져다주는 것도 있어. 중요한 건 시간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일이야."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내 눈을 바라보았다. ..
[책 이야기] 기사단장 죽이기 1 - 무라카미 하루키 p164 멘시키가 말했다. "그림 모델이란 참 긴장되는 일이군요. 옷을 벗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알몸이 돼버린 느낌이 들어요." 나는 말했다. "어떻게 보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림 모델은 종종 벌거벗겨지는 일이니까요-많은 경우 실제로, 가끔은 비유적으로요. 화가는 눈앞에 있는 모델의 본질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꿰둟어보려 합니다. 다시 말해 모델이 걸친 겉모습이라는 외피를 벗겨나가야 하는 거죠. 그러려면 물론 화가에게 뛰어난 안력과 날카로운 직관이 필요하고요." p348 세상에는 모르는 편이 더 좋은 일도 있어, 라고 아마다는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듣지 않는 편이 더 좋은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듣지 않고 버틸 수는 없다. 때가 오면 아무리 단단히 귀를 틀어막아도..
[책 이야기] 애프터 다크 - 무라카미 하루키 p202 그녀는 말한다. "그래서 생각하는 건데, 인간은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사는 게 아닐까? 그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기억인지 아닌지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아. 그냥 연료야. 신문 광고지가 됐는, 철학책이 됐든, 야한 화보사진이 됐든, 만 엔짜리 지페 다발이 됐든, 불을 지필 때는 그냥 종이쪼가리잖아? 불은 '오오, 이건 칸트잖아'라든지 '이건 요미우리 신문 석간이군'이라든지 '가슴 끝내주네'라든지 생각하면서 타는 게 아니야. 불 입장에선 전부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해. 그거랑 같은 거야. 소중한 기억도, 별로 소중하지 않은 기억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억도, 전부 공평하게 그냥 연료." 고오로기는 자신의 말에 대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말을 잇는다. "그래서 말이지,..
[책 이야기]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 무라카미 하루키 p19웨이트리스가 내 목에 걸린 완주 메달을 보고 "Oh, you are one of those crazy people, aren't you?"라고 말을 건다. 어머, 당신도 그 크레이지한 사람들 중 한명이군요. 그래요,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입니다. 고마워요. 그제야 비로소 '아, 올해도 보스턴을 달렸구나'라는 실감이 샘솟는다. p90불편함은 여행을 귀찮게 만들지만, 동시에 일종의 기쁨-번거로움이 가져다주는 기쁨-도 품고 있다. p181"라오스(같은 곳)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라는 베트남 사람의 질문에 나는 아직 명확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내가 라오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는, 소소한 기념품 말고는 몇몇 풍경에 대한 기억뿐이다. 그러나 그 풍경에는 냄새가 있고, 소리가 있고, 감촉이 있다. 그곳에는 특..
[책 이야기]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루쿠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자 없는 남자들', '렉싱턴의 유령',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등을 읽었지만 엄청 재밌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러면서 차츰 관심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무라카미 하루키가 마라톤 매니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묘비명에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고 써놓고 싶다고 한 것을 보게 되었다. 그 당시 나도 마라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문구를 보고 찌릿한 무언가와 함께 그 문구를 마음속에 새기게 되었다. 첫 하프마라톤 때 저 문구를 되새기며 걷지 않고 완주하였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다시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의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책 이야기]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 무라카미 하루키 나는 책을 선택할 때 제목이 끌리는 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 역시 제목에 끌렸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궁금하다. 주말에 약속이 없어 집에서 씻지 않고 면도도 하지 않고 있다가 오후에 갑작스럽게 약속이 생기면 면도를 하는 경우가 있다. 하루키도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하루키는 아침에 한 번 정도 면도를 하지만, 저녁 콘서트를 간다든가 중요한 사람과 식사를 하는 경우 저녁 무렵에 면도를 한다고 한다. 귀찮지만 저녁 무렵의 면도는 나름대로 분위기가 있고, 아침 면도와 같이 의무적이고 습관적인 행위가 아닌 일종의 살아 있다는 실감 같은 것을 느낀다고 한다. 나는 어떤가? 퇴근 후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그 중간에 시간이 남으면 다시 면도를 하고 나간 적도 있다. 물..
[책 이야기]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무라카미 하루키 대부분의 일반적인 러너는 "이번에는 이 정도 시간으로 달리자"라고, 미리 개인적 목표를 정해 레이스에 임한다. 그 시간 안에 달릴 수 있다면, 그 또는 그녀는 '뭔가를 달성했다' 고 할 수 있으며, 만약 그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하면 '뭔가를 달성하지 못했다' 라는 것이 된다. 만약 시간 내 달리지 못했다고 해도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실력을 발휘했다는 만족감이라든가, 다음 레이스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으면, 또 뭔가 큰 발견 같은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하나의 달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끝까지 달리고 나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혹은 프라이드와 비슷한 것)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장거리 러너에게 있어서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적어도 달리고 있는 동안은 누구와도 얘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