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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릭 모디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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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 파트릭 모디아노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무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위트는 '해변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한 인간을 그 예로 들어보이곤 했다. 그 남자는 사십 년 동안이나 바닷가나 수영장 가에서 여름 피서객들과 할 일 없는 부자들과 한담을 나누며 보냈다. 수천수만장의 바캉스 사진들 뒤..
[책 이야기] 발레소녀 카트린 - 파트릭 모디아노 우리 학생들 가운데 안경을 쓴 여자 아이가 하나 있다. 그 아이는 강습이 시작되기 전에 안경을 의자 위에 올려놓고 춤을 춘다. 같은 나이에 내가 디스마일로바 선생님 학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누구도 안경을 쓰고 춤을 추지 않는다. 디스마일로바 선생님에게서 무용을 배우던 시절, 저녁에 있을 무용 강습을 생각해서 낮 동안 안경을 쓰지 않고 지내는 훈련을 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럴 때면 사람과 사물의 윤곽이 예리함을 잃으면서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이고 소리마저도 점점 둔탁해졌다. 안경을 쓰지 않고 보면, 세상은 더 이상 꺼슬꺼슬하지 않았고, 뺨을 대면 스르르 잠을 불러 오던 내 커다란 새털 배게만큼이나 포근하고 보들보들했다. 그런 나를 보고 아빠는 이렇게 묻곤 했다. 「카트린, 무슨 생각 하고 있니? 안경을 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