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흰 - 한강
소금, 눈, 얼음, 파도, 백목련, 흰새, 수의... 흰 것에 대한 이야기. p15누군가가-아마 그동안 이 집에 세들었던 사람들 중 하나가-송곳 같은 날카로운 것으로 구 문의 표면을 긁어 숫자를 기입해놓았다. 획순을 따라 나는 곰곰이 들여다보았다. 세 뼘 크기의 커다랗고 각진 3. 그보다 작지만 여러 번 겹쳐 굵게 그어 3보다 눈에 먼저 들어오는 0. 마지막으로 가장 깊게, 온힘을 다해 길게 긁어놓은 1. 난폭한 직선과 곡선들의 상처를 따라 검붉은 녹물이 번지고 흘러내려 오래된 핏자국처럼 굳어 있었다. 난 아무것도 아끼지 않아. 내가 사는 곳, 매일 여닫는 문, 빌어먹을 내 삶을 아끼지 않아, 이를 악문 그 숫자들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그것이 내가 얻으려 하는 방, 그 겨울부터 지내려 하는 방의 문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