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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책책/책 이야기

[책 이야기]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 스미노 요루

 

 

p13

"어제 텔레비전에서 봤거든. 옛 사람들은 어딘가 안 좋은 곳이 있으면 다른 동물의 그 부분을 먹었대."

"근데 그게 뭐?"

"간이 안 좋으면 간을 먹고, 위가 안 좋으면 위를 먹고, 그러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p37

"췌장은 네가 먹어도 좋아."

"내 얘기 듣고 있어?"

"누군가 나를 먹어주면 영혼이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산다는 신앙도 외국에는 있다던데."

 

p80

깨달았다.

모든 인간이 언젠가 죽을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나도, 범인에게 살해된 피해자도, 그녀도, 어제는 살아 있었다. 죽을 것 같은 모습 따위, 내보이지 않은 채 살아 있었다. 아, 그렇구나, 그게 바로 어떤 사람이든 오늘 하루의 가치는 모두 다 똑같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p196

"아니, 우연이 아냐. 우리는 모두 스스로 선택해서 여기까지 온거야. 너와 내가 같은 반인 것도, 그날 병원에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야. 그렇다고 운명 같은 것도 아니야. 네가 여태껏 해온 선택과 내가 여태껏 해온 선택이 우리를 만나게 했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난 거야."

 

p205

다시 한 번 말한다. 나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 어째서 그들은 다수파의 생각이 옳다고 굳게 믿어버리는가. 아마 그들은 서른명쯤만 모이면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들에게 정당성이 있다고 믿기만 하면 어떤 악한 짓이라도 서슴없이 저지르지 않을까. 그것이 인간성이 아니라 기계적인 시스템이라는 것도 알지 못한 채.

 

p238

"나 죽으면 내 췌장을 꼭 먹어줘."

"혹시 안 좋은 곳이 없어지면 죽지 않을까? 지금 당장이라도 먹어줄까?"

"내가 살아있었으면 좋겠어?"

"무척."

 

p253

그녀가 죽었다.

세상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았다.

이 상황에 이르러서도 나는 여전히 만만하게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일 년이라는 시간이 남겨져 있다고만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도 마찬가지였는지 모른다.

최소한 나는 어느 누구에게나 내일이 보장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었다.

나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그녀에게는 당연히 내일이 있는 것처럼 생각했었다.

아직 시간이 있는 나의 내일은 알 수 없지만 이미 시간이 없는 그녀의 내일은 약속되어 있다고만 생각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인식이었던가.

나는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생명만은 이 세상이 잘 봐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물론 그런 일은 없다. 없었다.

세상은 차별하지 않는다.

건강한 몸을 가진 나 같은 인간에게도, 병을 앓아 머지않아 사망할 그녀에게도, 그야말로 평등하고 공격의 고삐를 풀지 않는다.

우리는 잘못 생각했다. 바보였다.

하지만 어느 누가 잘못한 우리를 비웃을 수 있을까.

마지막 회가 정해진 드라마는 마지막 회까지는 끝나지 않는다.

끝이 정해진 만화는 끝날 때까지는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이 예고된 영화는 마지막 장면까지는 끝나지 않는다.

모두가 그것을 믿으며 살아왔으리라. 그렇게 배워왔으리라.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까지는 끝나지 않는다, 라고 믿었다.

그녀는 또 웃을까, 소설을 너무 지나치게 많이 읽었다고?

웃음을 사도 상관없다.

마지막까지 꼭 읽고 싶었다. 그리고 읽을 예정이었다.

나머지 몇 페이지를 백지로 남겨둔 채 끝나버린 그녀의 이야기.

전조도 복선도 오독도 그냥 내팽개쳐둔 채.

이제는 그 어떤 것도 알아내는 게 불가능하다.

그녀가 꾸민 밧줄 장난의 결말도.

그녀의 비장의 마술 트릭도.

그녀가 사실은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이제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