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64
멘시키가 말했다. "그림 모델이란 참 긴장되는 일이군요. 옷을 벗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알몸이 돼버린 느낌이 들어요."
나는 말했다. "어떻게 보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림 모델은 종종 벌거벗겨지는 일이니까요-많은 경우 실제로, 가끔은 비유적으로요. 화가는 눈앞에 있는 모델의 본질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꿰둟어보려 합니다. 다시 말해 모델이 걸친 겉모습이라는 외피를 벗겨나가야 하는 거죠. 그러려면 물론 화가에게 뛰어난 안력과 날카로운 직관이 필요하고요."
p348
세상에는 모르는 편이 더 좋은 일도 있어, 라고 아마다는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듣지 않는 편이 더 좋은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듣지 않고 버틸 수는 없다. 때가 오면 아무리 단단히 귀를 틀어막아도 소리는 공기를 진동시키며 사람의 마음을 파고든다. 그것을 막기란 불가능하다. 그게 싫다면 진공의 세계로 가는 수 밖에 없다.
p556
지금까지 내 길인 줄 알고 별생각 없이 걸어왔던 길이 갑자기 발밑에서 쑥 사라져버리고,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허허벌판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런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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