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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여자 없는 남자들 - 무라카미 하루키

 

 

구리야 에리카는 에어컨 바람에 일렁일렁 흔들리는 양초 불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나는 자주 똑같은 꿈을 꿔. 나와 아키가 배에 타고 있어. 기나긴 항해를 하는 커다란 배야. 우리는 단둘이 작은 선실에 있고, 밤늦은 시간이라 둥근 창 밖으로 보름달이 보여. 그런데 그 달은 투명하고 깨끗한 얼음으로 만들어졌어. 아래 절반은 바다에 잠겨 있고. '저건 달처럼 보이지만 실은 얼음으로 되어 있고, 두께는 한 이십 센티미터쯤이야.'  아키가 내게 알려줘. '그래서 아침이 와서 해가 뜨면 녹아버려.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동안 잘 봐두는 게 좋아.' 그런 꿈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꿨어. 무척 아름다운 꿈이야. 언제나 똑같은 달. 두께는 언제나 이십 센티미터. 아래 절반은 바다에 잠겨 있어. 나는 아키에게 몸을 기대고 있고, 달은 아름답게 빛나고, 우리 단둘이고, 부드러운 파도 소리가 들려. 하지만 잠에서 깨면 항상 몹시 슬픈 기분이 들어. 얼음달은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구리야 에리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나와 아키 단둘이서 그런 항해를 계속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해. 우리는 매일 밤 둘이서 나란히, 둥근 창으로 얼음달을 보는 거야. 달은 아침이 오면 녹아버리지만 밤에는 다시 그곳에 모습을 드러내. 하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 어느 날 밤, 달은 더이상 나오지 않을지도 몰라. 달이 더이상 나오지 않는 밤을 상상하면 너무 무서워. 내일 내가 어떤 꿈을 꿀지 생각하면, 몸이 소리를 내며 오그라들 것처럼 무서워."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면 내 마음도 따라서 당겨집니다. 로프로 이어진 두 척의 보트처럼. 줄을 끊으려 해도 그걸 끊어낼 칼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어요.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그날은 아주 작은 예고나 힌트도 주지 않은 채, 예감도 징조도 없이, 노크도 헛기침도 생략하고 느닷없이 당신을 찾아온다. 모퉁이 하나를 돌면 자신이 이미 그곳에 있음을 당신은 안다. 하지만 이젠 되돌아갈 수 없다. 일단 모퉁이를 돌면 그것이 당신에게 단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린다. 그 세계에서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로 불린다. 한없이 차가운 복수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