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책책/책 이야기

[책 이야기]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최진영

 

 

나는 기차가 뒤로 달리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기차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달린다. 하지만 버스는 앞뒤로 움직인다. 정말 집을 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라면 무겁고 긴 기차를 타야 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을 까먹을 만큼 아주 멀리 가야 한다. 가볍고 짧고 후진을 잘하는데다가 우리집 앞을 지나가고 중간에 내릴 수도 있는 버스는 타나 마나다. 버스는 떠나려는 마음을 고무줄처럼 당겼다가 확 놓아버리고 만다. 나는 가짜엄마가 백 번 넘게 나를 굶기는 것보다 집을 완전히 나가지 않고 자꾸만 돌아오는 게 더 싫었다. 가짜엄마가 가짜가출을 많이 할수록 가짜아빠의 행패는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만큼 잦아졌다. 나는 내 가짜가족이 갈기갈기 찢어진 종이처럼 각자의 바람을 따라 멀리 날아가길 바랐다. 돌아보지도 돌아오지도 멈추지도 않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멀리, 아주 머얼리.

 

나보다 조금 뒤늦게 식당으로 돌아온 할머니의 손에는 책이 들려있었다. 찬수가 풀었던 문제집과 비슷한 것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보는 앞에서 문제를 휙휙 풀어댔다. 할머니는 꾸부정하게 앉아 내가 하는 모양을 오랫동안 쳐다보다가 활짝 웃었다. 그때 처음 봤다. 할머니의 웃는 모습, 할머니가 웃으니까 나도 웃음이 날 뻔했다. 그래도 꾹 참았다. 하지만 웃음은 눈물과 달리 참는다고 쉽게 참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참고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아주 조금 웃었다. 내가 웃는 걸 보고 할머니가 또 웃었다. 봄바람이 창문을 와르르 훑으며 지나갔다.

 

할머니는 가을 잠바와 바지도 하나씩 사주었다. 정말 왜 이래? 나는 마음으로 계속 물었다. 할머니가 한번 입어보라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시장에서 사는 옷보다 할버니가 만들어주는 옷이 훨씬 더 좋다. 할머니가 만들어주는 옷은 세상에 오직 하나뿐이고, 오직 나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니까. 흔해 빠진데다 누구나 다 입는 시장 옷은 싫다. 할머니는 내 마음도 모르고 자꾸 옷을 입어보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입었다. 나는 할머니 속을 썩이지 않고, 할머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으니까.

나에게도 직감이란 게 있다.

아니, 불행하게도, 내겐 직감밖에 없다.

 

죽은 자의 입술처럼 사방이 시커멓게 되었을 때, 나는 머릿속의 서랍을 탈탈 털어내고 그곳에 나의 진짜엄마가 갖춰야 할 조건을 하나하나 챙겨넣었따. 그리고 그것들이 내 심장에, 내 배꼽에, 내 손바닥 발바닥에 모조리 스며들도록 오랫동안 응시하며 하나하나 외웠다. 나의 진짜 엄마는,

첫째, 맞고만 있지 않는다.

둘째, 얼굴이 메추리알 같다.

셋째, 내 숨소리에 언제나 귀 기울인다.

아니, 이딴 건 다 필요 없으니까 오직 하나, 반드시 불행해야 한다.

 

해에겐 해라는 이름이 있고 달에겐 달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반짝이는 저 많은 별들은 다 그냥 별이니, 어쩜 나와 비슷하다. 저마다 이름이 있고 나이가 있는데 내겐 그런 것이 없으니. 나는 반짝이는 별들 중 가장 밝은 별 하나를 오랫동안 쳐다봤다.  그것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서 여러 가지 이름을 생각해봤지만 딱히 맘에 드는 게 없었다. 그냥 별이라는 이름이 가장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마을을 바꿔 먹었다. 저 별은 그냥 별로 두고, 다른 별에게 모조리 이름을 붙여주기로. 그럼 저 별만 특별해질 거다. 세상 사람에겐 모두 이름이 있는데 내게만 이름이 없는 것처럼. 나는 이상한 게 아니라 특별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