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눈, 얼음, 파도, 백목련, 흰새, 수의...
흰 것에 대한 이야기.
p15
누군가가-아마 그동안 이 집에 세들었던 사람들 중 하나가-송곳 같은 날카로운 것으로 구 문의 표면을 긁어 숫자를 기입해놓았다. 획순을 따라 나는 곰곰이 들여다보았다. 세 뼘 크기의 커다랗고 각진 3. 그보다 작지만 여러 번 겹쳐 굵게 그어 3보다 눈에 먼저 들어오는 0. 마지막으로 가장 깊게, 온힘을 다해 길게 긁어놓은 1. 난폭한 직선과 곡선들의 상처를 따라 검붉은 녹물이 번지고 흘러내려 오래된 핏자국처럼 굳어 있었다. 난 아무것도 아끼지 않아. 내가 사는 곳, 매일 여닫는 문, 빌어먹을 내 삶을 아끼지 않아, 이를 악문 그 숫자들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얻으려 하는 방, 그 겨울부터 지내려 하는 방의 문이었다.
p80
하얗게 웃는다, 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p87
사람들은 왜 은과 금,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광물을 귀한 것으로 여기는 걸까? 일설에 의하면 물의 반짝임이 옛 인간들에게 생명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빛나는 물은 깨끗한 물이다. 마실 수 있는-생명을 주는-물만이 투명하다. 사막을, 숲을, 더러운 늪지대를 무리지어 헤매다가 하얗게 반짝이는 수면을 발견했을 때 그들이 느낀 건 찌르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생명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책책책 >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이야기] 애프터 다크 - 무라카미 하루키 (0) | 2017.06.22 |
---|---|
[책 이야기] 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 - 김진명 (0) | 2017.06.18 |
[책 이야기] 백종원의 장사 이야기 - 백종원 (0) | 2017.06.12 |
[책 이야기] 실어증입니다, 일하기싫어증 - 양경수 (0) | 2017.06.06 |
[책 이야기] 채식주의자 - 한강 (0) | 2017.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