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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말한다. "그래서 생각하는 건데, 인간은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사는 게 아닐까? 그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기억인지 아닌지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아. 그냥 연료야. 신문 광고지가 됐는, 철학책이 됐든, 야한 화보사진이 됐든, 만 엔짜리 지페 다발이 됐든, 불을 지필 때는 그냥 종이쪼가리잖아? 불은 '오오, 이건 칸트잖아'라든지 '이건 요미우리 신문 석간이군'이라든지 '가슴 끝내주네'라든지 생각하면서 타는 게 아니야. 불 입장에선 전부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해. 그거랑 같은 거야. 소중한 기억도, 별로 소중하지 않은 기억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억도, 전부 공평하게 그냥 연료."
고오로기는 자신의 말에 대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말을 잇는다.
"그래서 말이지, 만약 그런 연료가 나한테 없었다면, 기억의 서랍 같은 게 내 안에 없었다면, 난 이미 오래전에 반 동강 났을 거야. 어디 궁상맞은 곳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길바닥에서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 소중한 거, 시시한 거, 이런저런 기억을 그때그때 서랍에서 꺼낼 수 있으니까 이런 악몽 같은 생활을 하고 있어도 그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는 거야. 이젠 틀렸다, 더는 못 해먹겠다 싶어도 그럭저럭 고비를 넘길 수 있어."
마리는 의자에 앉은 채 고오로기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러니까 마리 너도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이것저것 떠올려봐. 언니에 관해서. 분명히 중요한 연료가 될 테니까. 너 자신한테, 그리고 아마 언네한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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