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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정도전 - 이재운

 

 

이 책 한 권이 네 할아버지 정도전의 인생을 바꿔 버렸다.

시묘살이 하는 동안에는 시간이 많으니 아버지는 <맹자>를 펼쳐놓고 열심히 읽었지. 그런데 그만 양나라 예왕편을 읽으시다가 기름을 들이부은 듯 온몸에 불이 붙은 거야. 몽골의 내정간섭으로 망친 고려, 그런 세상을 한탄하던 한 젊은이가 눈을 번쩍 뜬 거지.

- 인을 해치는 자는 그저 도적에 불과하고, 의를 해치는 자는 한낱 강도일 뿐입니다. 그런즉 도적과 강도는 쓸모없는 범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일개 범부가 된 걸과 주를 쳐 죽였다는 말은 들어 보았으나 그것을 가리켜 임금을 시해한 것이라고 하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라의 걸왕과 상나라의 주왕은 유명한 폭군이다. 그런 폭군을 죽이는 것은 임금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심을 잃은 도적이나 강도 따위를 죽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맹자의 이 서늘한 말씀, 그것은 아버지에게 속삭이는 하늘님의 천둥소리였다. 걸왕, 상왕을 죽인 것이 아니라 저 흔하디흔한 죄인 한 놈을 응징한 것에 불과하다는 맹자의 이 말씀을 접한 아버지는 심장이 쿵쾅거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단다. 묘막을 걷어붙이고 나가 하늘을 향해 마구 소리를 지르셨지.

- 내가 고려 도적, 고려 강도를 다 쳐 죽이고 이 나라를 다시 세우리라!

 

용비어천가에는 아버지가 이성계 전하를 처음 만나던 장면이 잘 그려져 있다.

- 정도전은 태조를 쫓아 함주막사로 갔다. 이때 태조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있었다.

태조의 호령이 엄숙하고 대오가 질서정연한 것을 보고 정도전은 은근히 말하였다.

"참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태조가 "무슨 뜻인가?" 묻자, 정도전은 "동남방의 근심인 왜적을 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라며 짐짓 딴청을 부렸다. 그리고는 "군영 앞에 노송 한 그루가 있으니 소나무 위에다 시를 한 수 남기겠습니다." 라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푸른 산 만 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으시오, 훗날 서로 뵐 수 있으리까

인간세상이란 잠깐 사이에 묵은 자취인 것을

정도전은 이미 천명의 소재를 알고 따른 것이다.

그렇게 하여 두 분은 비밀리에 군사를 기르면서 송골매처럼 때를 보았지. 그 뒤로도 아버지는 함흥을 몇 번이나 더 찾아갔다. 그러다 위화도 회군을 벌여 개경을 들이친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