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책책/책 이야기

[책 이야기] 라플라스의 마녀 - 히가시노 게이고

 

 

p353

"그러면 잠깐 이런 상상을 해볼까요? 우선 한 변의 길이가 30센티미터쯤 되는 주사위가 있습니다. 소재는 나무로 하면 좋겠지요. 그 주사위를 6이라는 숫자가 위로 나오도록 양손에 끼워 들고 1미터 높이에서 판판하게 고른 모래 위에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한 변이 30센티미터인 주사위를 모래 위에......" 아오에는 미간을 좁히고 그 상황을 머리속에 떠올렸다. "모래 위에 떨어진다면 주사위는 굴러가지 않겠지요. 반듯하게 아래로 떨어지면 6이라는 숫자가 위로 드러난 채 모래에 살짝 파묻히겠네요."

"그렇죠. 보세요, 조건이 갖춰지면 교수님도 예측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아니, 그것과 이건 얘기가 다른데......"

"똑같습니다. 현상이 다소 복잡해지기는 해도 물리법칙을 바탕으로 예측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어요.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이 영상을 촬영하기 전까지 겐토 군은 100번이 넘게 실제로 실행해봤어요. 처음에는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지만, 50번을 넘어설 때부터 적중률이 높아졌습니다. 주사위나 책상에 관한 물리적 데이터가 구비되었다는 얘기겠지요. 그러니 다른 주사위를 사용할 경우에는 다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참고로, 주사위가 이보자 작으면 적중률이 뚝 떨어져요. 겐토 군에 의하면 책상 표면의 위치에 따라서 반발계수가 미묘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라는군요."

 

p360

"나는 라플라스의 마녀가 되고 싶다, 라고 했어요."

"라플라스?"

"마도카의 마음을 뒤흔든 것은 토네이도입니다."

 

p387

"수학자 라플라스를 아십니까? 풀네임은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 프랑스인이에요." 기리미야 레이가 아오에에게 질문을 던졌다.

"라플라스? 아니, 들은 적이 없는데."

"만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의 현재 위치와 운동량을 파악해내는 지성이 존재한다면 그 존재는 물리학을 활용해 그러한 원자의 시간적 변화를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미래까지 완전하게 예지가 가능하다......" 기리미야 레이는 마치 시를 읊는 것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라플라스는 그런 가설을 세웠습니다. 그 존재에는 나중에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별명이 붙었어요. 겐토 군의 예측 능력은 그 라플라스의 악마와 이미지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수리학 연구소에서는 겐토 군의 능력에 대한 연구를 '라플라스 계획'이라고 명명하기로 했습니다."

 

p464

"내가 알았다기보다 이 사건을 여태까지 수사해온 형사들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 나카오카 형사라고, 내가 전에 얘기했었지? 그 형사가 아마카스 사이세이에 대해 흥미로운 얘기를 해줬어. 젊은 시절부터 아마카스는 완벽주의자였다, 스스로도 항상 완벽한 인간이 되려고 했고, 사귀던 여자 친구에게도 자신의 이상을 강요했다, 라는거야."

"역시 이상한 사람이네요. 그래서 교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거예요?"

"아마카스가 가족을 해친 이유는 그들이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예?"

"아내도 딸도 아들도, 자신이 꿈꿔온 모습과 거리가 있었어. 완벽하지를 않았지. 그래서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다. 즉 죽이기로 했다. 어때, 그런 거 아닐까?"

 

p497

"당신은 수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중 가장 큰 잘못이 무엇인지 알려줄게. 대다수의 범용한 인간들은 아무런 진실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버리고, 그런 인간들은 태어나든 태어나지 않았든 이 세상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아까 당신이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아니야. 얼필 보기에 아무 재능도 없고 가치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야말로 중요한 구성 요소야. 인간은 원자야. 하나하나는 범용하고 무자각적으로 살아갈 뿐이라 해도 그것이 집합체가 되었을 때, 극적인 물리법칙을 실현해내는 거라고. 이 세상에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 따위는 없어, 단 한 개도."

 

p508

이소베가 방대한 양의 파일을 꺼재 왔다. 위험 지역으로 지정한 지점의 황화수소 농도를 측정한 기록이다. 그것을 보고 아오에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건의 배경을 알지 못하는 범용한 사람들은 이토록 성실하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해온 것이다. 이것이 의미 없는 일일까.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 의미 없는 노력이란 이 세상에 없다. 이것 또한 원자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