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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7년의 밤 - 정유정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해 파멸의 질주를 멈출 수 없었던 한 사내의 이야기.

딸의 복수를 꿈꾸는 남자와 아들의 목숨을 지키려는 남자.

한 남자의 딸, 자신의 아내, 마을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형수의 아들이 겪는 이야기.

 

 

p28

나는 카메라플래시를 받으며 서 있었던 열두 살 이래로 허둥댄 적이 없다. 소년분류심사원에 다녀온 후부턴 분노하지도 않는다. 누군가 호감을 표해와도 관계에 대한 기대를 품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다. 안다. 놀라면 허둥대야 정상이다. 모욕당하면 분노하는 게 건강한 반응이다. 호감을 받으면 돌려주는 게 인간적 도리다. 내 또래 아이들은 대부분 그렇게 산다. 아저씨는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 문장에서 '그렇게'를 떼어내라고 대꾸한다.

나도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당황하고, 분노하고, 수치심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곁을 내줘서는 안 된다. 거지처럼 문간에 서서, 몇 시간씩 기다려서라도 일한 대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을 사는 나의 힘이다. 아니, 자살하지 않는 비결이다.

 

p408

누군가 남편에게 자신의 삶을 걸고 지켜야 할 '어떤 사람'이 있노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어떤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걸 버릴 수 있느냐고 물어도 마찬가지 답을 할 것이다. 최종적으로, '어떤 사람'을 버리는 것이 지키는 길이라면, '어떤 사람'을 버릴 수 있겠는가, 라고 물어도 이 역시 '예스'라는 답을 듣게 될 것이다. 서원을 그녀에게 데려가라고 한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서원을 버리는 것 말고는 지킬 길이 없다는 의미.

 

p454

팀장은 주머니를 열고 휴대전화를 꺼대 건넸다. 깨지지도 않았고, 배터리 용량도 충분히 남아 있었다. 승환은 폴더를 열었다. 서원은 신호 한번에 바로 전화를 받았다.

"아빠예요?"

그가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팀장이 전화를 낚아챘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저씨에요?"라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더니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