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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렉싱턴의 유령 - 무라카미 하루키

 

 

아마도 그렇게 계속 2주일쯤 잤을 거라고 생각해. 나는 자고 자고 또 자고......, 시간이 썩어서 녹아 없어질 때까지 잤어. 얼마든지 끝없이 잘 수 있을 것 같았어. 아무리 자도 잠이 모자란 거야. 그때의 나에겐 잠의 세계가 진짜 세계고, 현실 세계는 덧없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세계에 지나지 않았어. 그건 색채를 잃은 천박한 세계였어. 그런 세계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까지 생각했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에 아버지가 느끼셨을 심정을, 그때 나는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었던 거야.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사물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야. 그것은 다른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거지."

케이시는 거기서 잠시 입을 다물고, 무엇인가 생각에 잠겼다. 가을이 끝나가던 무렵이라, 모밀잣밤나무 열매가 아스팔트 길 위로 툭툭 떨어지는 메마른 소리가 이따금씩 들렸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하고 케이시는 얼굴을 들고, 여느 때처럼 따뜻하고 멋진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말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죽는다 해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나를 위해 그렇게 깊은 잠을 자주지는 않을 거라는 거야."

 

내가 정말 무섭다고 생각하는 건, 아오키 같은 인간이 내세우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믿어버리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입맛에 맞고 받아들이기 쉬운 다른 사람의 의견에 놀아나 집단으로 행동하는 무리들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한 무의미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결정적인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고는 짐작도 하지 못하는 무리들이지요.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정말 무서운 건 그런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내 한밤중의 꿈속에 등장하는 것도 그런 사람들이지요. 꿈속에서는 침묵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꿈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얼굴이란 걸 갖고 있지 않습니다. 침묵이 차가운 물처럼 모든 것에 조금씩 스며들어 갑니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이거고 저거고 모든 것이 질척하게 녹아버리고 말지요. 그리고 어느순간 내가 그 속으로 녹아들면서 아무리 소리를 쳐도, 누구하나 귀 기울여주지 않지요."

 

"내가 생각하기에, 이 우리의 인생에서 정말로 무서운 건, 공포 그 자체는 아닙니다."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렇게 말했다. "공포는 확실히 인생의 내부에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서 때로는 우리의 존재를 압도해 버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그 공포를 향해서 등을 돌리고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함으로써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무엇인가에 주어버리게 됩니다. 내 경우, 그건 바로 파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