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책책/책 이야기

[책 이야기] 악의 - 히가시노 게이고

 

 

나는 눈을 떴다. 가가 형사의 맑은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나는 왠지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주 한순간의 묵상이 내 마음을 진정시켜주고 있었다.

"자네가 찾는 것이 발견된다면 나를 체포하겠군?"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유감스럽습니다만."

"그 전에......" 나는 물었다. "자수하는 것도 가능할까?"

 

통상 범죄 계획이라는 건 범인이 자신이 체포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짜여지는 법입니다. 어떻게든 자신의 범행이 발각되지 않도록 애를 쓰고, 혹시 발각되더라도 자신에게 혐의가 돌아오지 않도록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며 범인은 머리를 쥐어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범죄 계획은 그것과는 완전히 목적이 달랐습니다. 당신은 체포되는 것을 전혀 피하지 않았어요. 아니, 그러기는커녕 모든 계획이 자신이 체포될 것을 전제로 해서 세워졌던 것이지요.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얘기입니다. 노노구치 씨, 당신은 오랜시간과 수고를 들여 범죄의 동기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히다카 구니히코 씨를 살해하기에 적합한 동기를 말이죠.

 

이번 사건을 맡으면서 문학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접해보게 되었습니다만, 작품을 평하는 말 중에 독특한 표현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인간을 묘사한다'라는 말입니다. 한 인물이 어떤 인간인지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글을 써서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뜻일 텐데, 그건 단순한 설명문으로는 어렵다고 하더군요. 아주 작은 몸짓이나 몇 마디 말 같은 것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그 인물의 이미지를 만들어나가도록 쓰는 것이 '인간을 묘사한다'라는 것이라던데요?

당신은 거짓으로 점철된 수기를 통해 히다카 구니히코라는 인물의 잔혹성을 묘사하여 일찌감치 독자, 즉 우리에게 나쁜 이미지를 심어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준비한 에피소드가 그 '고양이 죽이기'였던 것이지요.

 

당신의 마음속에서 당신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히다카 씨에 대한 깊디깊은 악의가 잠재되어 있었고, 그것이 이번 사건을 일으키게 한 동기가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