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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 무라카미 하루키

 

 

나는 책을 선택할 때 제목이 끌리는 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 역시 제목에 끌렸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궁금하다.

주말에 약속이 없어 집에서 씻지 않고 면도도 하지 않고 있다가 오후에 갑작스럽게 약속이 생기면 면도를 하는 경우가 있다. 하루키도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하루키는 아침에 한 번 정도 면도를 하지만, 저녁 콘서트를 간다든가 중요한 사람과 식사를 하는 경우 저녁 무렵에 면도를 한다고 한다. 귀찮지만 저녁 무렵의 면도는 나름대로 분위기가 있고, 아침 면도와 같이 의무적이고 습관적인 행위가 아닌 일종의 살아 있다는 실감 같은 것을 느낀다고 한다.

나는 어떤가? 퇴근 후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그 중간에 시간이 남으면 다시 면도를 하고 나간 적도 있다. 물론 귀찮지만 중요한 자리이고 조금이라도 잘 보이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실감을 느끼진 못했다.

주말의 경우 면도하지 않고 버티다가 저녁에 갑작스레 약속이 생기면 고민한다. 면도를 할까 말까. 나의 경우 짧은 수염을 조금이라도 더 길러서 한번에 짜르고 싶은 욕망(?)이 있다. 뭔가 더 시원한 기분이다.

이 책에 수록된 오십 편의 글은 잡지 <앙앙anan>에 매주 한 편씩 일 년 동안 연재한 것이라고 한다. 일상적인 주제로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을 법한 것들을 하루키는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있다.

일상적이지만 엉뚱하면서도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들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p10

생각건대, 인간이란 본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어떤 계기로, '자, 오늘부터 달라지자!' 하고 굳게 결심하지만, 그 어떤 것이 없어져버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마치 형상기억합금처럼, 혹은 뒷걸음질쳐서 구멍 속으로 숨어버리는 거북이처럼 어물어물 원래 스타일로 돌아가버린다. 결심 따위는 어차피 인생의 에너지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옷장을 열고 팔도 제대로 끼어보지 않은 슈트와 주름 하나 없는 넥타이를 보면서 그런 사실을 통감했다.

 

p94

평소 나는 아침에 한 번 정도 면도를 하지만, 가끔 저녁 무렵에 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저녁 콘서트에 간다든가 중요한 사람과 식사를 한다든가 하는 경우다. 나는 저녁 이후로는 거의 스케줄이 없는 농경민족처럼 생활하기 때문에 자주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그런 일이 있다. 물론 귀찮다고 하면 귀찮겠지만, 저녁 무렵의 면도는 그 나름대로 분위기가 있어서 '자, 이제 외출이다' 하는 새로운 기분이 든다. 적어도 아침 면도 같이 그저 의무적이고 습관적인 행위는 아니다. 거기에는 일종의 살아 있다는 실감 같은 것이 있다.

 

p123

행운이 한꺼번에 거듭된 뒤에는 반드시 그 반향이 찾아온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정말로.

 

p187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깊은 상처가 되는가 하면, 잘못된 칭찬을 받는 것일 터다. 이미 상당 부분 확신하는 바이다. 그런 칭찬을 받다가 망한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인간이란 칭찬에 부응하고자 무리하게 마련이고, 그러면서 본래의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이유 없는 (혹은 이유 있는) 험담을 듣고 상처를 입더라도, "아, 잘됐어. 칭찬받지 않아서 다행인걸. 하하하" 하고 넘겨보시길. 물론 그렇게 생각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