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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모먼트 - 혼다 다카요시

 

 

"이 병원에는 죽음을 앞둔 사람의 소원을 뭐든 들어주는 청부업자가 있다는 소문입니다. 처음 소문이 퍼질 때만 해도, 청부업자가 심야의 병실에 나타나는 흑의의 남자였죠. 그런데 어떤 사정으로 최근에는 쥐색 작업복의 청소부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흐음."

이가라시 씨가 콧소리를 냈다.

"자네인가?"

개의치 않고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소문 가운데 쥐색 작업복의 청소부였을 청부업자가, 최근 들어 흑의의 남자로 다시 바뀌었습니다. 처음 소문이 돈 건 3년 전, 당신이 아직 병원에 있던 무렵입니다. 흑의의 남자로 바뀐 건 최근, 당신이 돌아와서입니다. 이게 우연일까요?"

이기라시 씨는 아무 말도 않고 어깨를 실룩거렸다. 그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청부업자였습니다. 당신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소문은 단순한 동화가 되어 쥐색 작업복의 청소부에게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다시 흑의의 남자가 부활했습니다. 당신이 돌아와 일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틀린가요?"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물론 인정할 리가 없었다. 나라도 순순히 인정하지 않으리라. 나는 막무가내로 카드를 계속 내놨다.

"그렇지만 그 소문에는 오해가 있습니다.전해져 내려오는 사이 내용이 바뀌었죠. 흑의의 청부업자는 소원을 뭐든 들어주지 않는다. 딱 하나만 들어준다고 말입니다. 딱 하나. 즉, 죽음을 앞에 둔 환자에게 죽음을 선사한다. 그것만 이뤄주는 겁니다. 당신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간 건 어째서입니까? 하고 있던 일이 탄로 날 것 같아 주의를 돌리려고 했나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라고 이가라시 씨가 머리 뒤로 깍지를 낀 채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즉 자네는 이 병원의 누군가가 말기 환자에게 안락사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거라면 나는 찬성이야. 때로는 그게 최선의 치료법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이가라시 씨는 처음으로 카드를 보였다. 그 카드를 신중히 음미하며 나는 말했다.

"의사는 환자를 죽여도 용서받는다, 이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