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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칼의 노래 - 김훈

 

 

조정은 작전 전체의 승패보다도 가토의 머리를 간절하게 원했다. 가토는 임진년 출병의 제2진이었다. 가토의 부대는 하나절 만에 부산성을 깨뜨리고, 꽃놀이 가는 봄나들이 차림으로 가마 대열을 꾸며 북으로 올라갔다. 붙잡힌 조선 백성들이 그 가마를 메었다. 임금은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달아났었다. 임금은 가토의 머리에 걸린 정치적 상징성을 목말라 했다.

임금은 진실로 종묘사직 제단 위에 가토의 머리를 바치고 술 한잔을 따르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진 한움큼이 조선의 전부였다. 나는 임금의 장난감을 바칠 수 없는 나 자신의 무력을 한탄했다. 나는 임금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함대를 움직이지는 않았다. 나는 즉각 기소되었다. 권율이 나를 기소했고 비변사 문인 관료들은 나를 집요하게 탄핵했다. 서울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는 동안 나는 나를 기소한 자와 탄핵한 자들이 누구였던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정치에 아둔했으나 나의 아둔함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조정으로 보내는 장계를 썼다. 며칠 전 도원수부에서 전해온 임금의 유시에 대한 답신이었다. 그때, 임금은 수군이 외롭고 의지할 데 없으니 해전을 포기하고 장졸을 인솔해서 육지로 올라와 도원수부의 육군과 합치라는 것이었다. 나를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 지 얼마 안 되어 임금은 또 그런 유시를 내려보냈다. 임금은 적이 두려웠고, 그 적과 맞서는 수군통제사가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그것이 임금의 싸움이었다. 그날 밤 달은 상현이었다. 보름까지는 며칠이 남아 있었다. 그날 밤, 벽파진 수영에서 나는 간단히 썼다. 통제사가 된 뒤 두번째로 쓰는 장계였다.

......이제 수군을 폐하시면, 전하의 적들은 서해를 따라 충청 해안을 거쳐서 한강으로 들어가 전하에게로 갈 것이므로, 신은 멀리서 이것을 염려하는 바입니다. 수군이 비록 외롭다하나 이제 신에게 오히려 전선 열두 척이 있사온즉......

 

임진년의 싸움은 힘겨웠고 정유년의 싸움은 다급했다. 모든 싸움에 대한 기억은 늘 막연하고 몽롱했다. 싸움은 싸움마다 개별적인 것이어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때마다 그 싸움이 나에게는 모두 첫번째 싸움이었다. 지금 명량 싸움에 대한 기억도 꿈속처럼 흐릿하다. 닥쳐올 싸움은 지나간 모든 싸움과 전혀 다른 낯선 싸움이었다. 싸움은 싸울수록 경험되지 않았고, 지나간 모든 싸움은 닥쳐올 모든 싸움 앞에서 무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