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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 파트릭 모디아노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무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위트는 '해변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한 인간을 그 예로 들어보이곤 했다. 그 남자는 사십 년 동안이나 바닷가나 수영장 가에서 여름 피서객들과 할 일 없는 부자들과 한담을 나누며 보냈다. 수천수만장의 바캉스 사진들 뒤쪽 한구석에 서서 그는 즐거워하는 사람들 그룹 저 너머에 수영복을 입은 채 찍혀 있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며 왜 그가 그곳에 사진 찍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아무도 그가 어느 날 문득 사진들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위트에게 감히 그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해변의 사나이'는 바로 나라고 생각했다. 하기야 그 말을 위트에게 했다 해도 그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해변의 사나이'들이며 '모래는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우리들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밖에 간직하지 않는다'고 위트는 늘 말하곤 했다.

 

그때 내 속에서는 무엇인가 털컥 하고 걸리는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이 방의 정경이 어떤 불안감을, 이미 내가 경험한 일이 있는 섬뜩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저 건물의 전면들, 인적이 없는 거리들, 황혼녘에 보초를 서고 있는 실루엣들이 옛날에 익숙했던 어떤 노래나 어떤 향기와 마찬가지로 은근히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 같은 시간이면 자주 꼼짝도 하지 않고 여기 가만히 서서 감히 등불도 켤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무엇인가를 노리듯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뒤로 돌아선 다음 한동안 강둑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달리는 자동차들과 센 강 건너편, 샹 드 마르스 근처의 불빛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기 공원가의 어느 조그만 아파트 안에 내 삶의 그 무엇인가가, 나를 알았던 어떤 사람, 아직도 나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살아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한 어린 소녀가 황혼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돌아온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계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소녀가 멀어져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만큼이나 빨리 저녁빛 속으로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