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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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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방과 후 - 히가시노 게이고 순수하기 때문에 절망했을 때의 반항도 그만큼 큰 것이다. 역에 도착하자 나는 학생들을 따라 내렸다. 학생들의 옆모습을 얼핏 보았더니 깜짝 놀랄 정도로 천진난만했다. 만약 내가 죽었다면 무슨 소리를 들었을까. 갑자기 그들의 순진함이 무서워졌다. 나는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수업을 시작했다. 학생들과 교사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기 때문일까. 이런 날은 수업을 진행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이렇게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저도 법이나 사회 규제를 어길 만큼 강력한 우정이 청소년들의 마음을 흔드는 경우가 있다는 걸, 몇 번 경험해봐서 압니다. 이번 수사에 이렇게 진전이 없는 것도 대충 그런 이유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목격자나 증인이 거의 없는 걸 봐도 그렇습니다. 이 많은 학생..
[책 이야기] 가면산장 살인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 "당신네들 입으로 직접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것 같아서 내가 대신 말해 주는 거야. 당신네들은 하나같이 좋은 사람인 척하고 있지만 누군가 한 사람은 가면을 쓰고 있어. 그 여자를 죽인 사람은 당신네들 중에 있다고." "그녀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듯했어. 그러다 몇 초 후에 알아차린 것 같더군. 그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부릅떴으니 말이야. 그리고 말하더군. 네, 하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요, 하고 말이야. 그런데 나는 그 사정이라는 것을 듣지 않았어. 그녀의 반응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틀림없다, 이 아이가 우리 딸 도모미를 죽였다, 그렇게 확신했네. 나는 자상한 고모부의 표정을 지으면서 그녀에게 다가가 재빨리 등뒤로 돌아가서는 주저 없이 등에 칼을 꽂았어. 그녀는 거의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
[책 이야기] 악의 - 히가시노 게이고 나는 눈을 떴다. 가가 형사의 맑은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나는 왠지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주 한순간의 묵상이 내 마음을 진정시켜주고 있었다. "자네가 찾는 것이 발견된다면 나를 체포하겠군?"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유감스럽습니다만." "그 전에......" 나는 물었다. "자수하는 것도 가능할까?" 통상 범죄 계획이라는 건 범인이 자신이 체포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짜여지는 법입니다. 어떻게든 자신의 범행이 발각되지 않도록 애를 쓰고, 혹시 발각되더라도 자신에게 혐의가 돌아오지 않도록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며 범인은 머리를 쥐어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범죄 계획은 그것과는 완전히 목적이 달랐습니다. 당신은 체포되는 것을 전혀 피하지 않았어요. 아니, 그러기는커녕 ..
[책 이야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 히가시노 게이고 의식이 아득해져갔다. 잠들어버릴 것 같다. 그 편지글이 희미하게 뇌리에 떠올랐다. 당신이 음악 외길을 걸어간 것은 절대로 쓸모없는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당신의 노래에 구원을 받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만들어낸 음악은 틀림없이 오래오래 남습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곤란하지만, 아무튼 틀림없는 얘기예요. 마지막까지 꼭 그걸 믿어주세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믿어야 합니다. 아, 그런 건가. 지금이 마지막 순간인가. 그래도 나는 꼭 믿고 있으면 되는 건가. 내 음악 외길이 쓸모없지는 않았다는 것을 끝까지 믿으면 되는 건가. 그렇다면 아버지, 나는 발자취를 남긴 거지? 실패한 싸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발자취는 남긴 거지? 발 디딜 틈 없이 관중이 들어찬 원..
[책 이야기] 몽환화 - 히가시노 게이고 "내가 나팔꽃에 흥미를 가진 것은 아버지의 동생 즉 삼촌의 영향이야. 삼촌이 다양한 변화 나팔꽃을 피우는 것을 곁에서 보다가 나도 흥미가 생겼지. 하지만 삼촌은 어느 날 내게 말했어. 어떤 꽃을 피워도 좋지만 노란 나팔꽃만은 쫓지 마라. 이유를 물었더니 그것은 몽환화이기 때문이라고 했어." "몽환화?" "몽환夢幻의 꽃이라는 의미일세. 그뒤를 쫓으면 자기가 멸하고 만다고, 그렇게 얘기했어." 히노는 공허한 눈빛으로 사진을 바라보았다. 넋을 놓아버렸는지 입을 열 기색조차 없다. "대답하십시오, 당신이 두번째 손님이죠? 노란 나팔꽃을 훔친 사람은 당신이죠?" 그러자 드디어 히노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하야세의 눈을 봤다. "아닙니다." "아니다? 뭐가 아닙니까?" "훔치지 않았습니다." ..
[책 이야기] 다잉 아이 - 히가시노 게이고 "그 순간이 지금도 기억나나?" "꿈에 보일 정도로." 기우치가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도 이내 사라졌다. "차가 그 여자의 몸을 짓뭉개는 느낌을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어. 정말 한순간의 일이었는데, 마치 슬로 모션으로 움직이는 영상처럼 기억하고 있지. 몸이 조금씩 짓이겨지면서 살아 있는 사람이 점점 죽어 갔어. 가능하다면 한시 빨리 잊고 싶지. 하지만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신스케는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입 안이 바짝 말라들었다. 물을 마시고 싶었다. "특히, 망막에 각인되어 떨어지지 않는 게 있어. 뭐일 것 같나?" 신스케는 모르겠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눈이야." "눈?" "그래, 눈." 기우치는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기시나카 미나에가 죽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