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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종이달 - 가쿠다 미쓰요 종이달. 종이로 만든 달. 짝퉁 위선? 모조품? 사진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사진관에서는 초승달 모양의 가짜 달을 만들어서 그곳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가짜 달과 함께 행복한 얼굴로 가족 혹은 연인과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겼다. 거기에서 비롯되어 '종이달'이라고 하면, 인연이나 가족과 함께 보낸 가장 행복한 한때를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 종이달이 '가짜'와 '가장 행복했던 한때'를 중의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 소설과 잘 어울리는 제목인 것 같다. p156 역의 플랫폼에는 사람이 없었다. 리카는 긴 의자에 앉아 전철을 기다렸다. 파르스름한 하늘에 하얀 달이 남아 있었다. 갑자기 리카는 손가락 끝까지 가득 차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만족감이라기보다는 만능감에 가까웠다. 어..
[책 이야기] 기사단장 죽이기 2 - 무라카미 하루키 p12 '연습이지. 연습하다보면 갈수록 실력이 늘어." "하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잘 못 그리는 사람도 많잖아요." 맞는 말이다. 나는 미대 시절, 아무리 연습해도 실력이 전혀 늘지 않는 동기를 수도 없이 봤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사람은 처음부터 타고난 것에 크게 좌우된다. 그러나 그런 말을 꺼내면 이야기를 수습하기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연습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는 아니야. 어떤 재능이나 자질은 연습하지 않으면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거든." p24 "오늘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네요." 마리에가 말했다. "그런 날도 있어." 내가 말했다. "시간이 빼앗아가는 게 있는가 하면 시간이 가져다주는 것도 있어. 중요한 건 시간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일이야."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내 눈을 바라보았다. ..
[책 이야기] 언어의 온도 - 이기주 p25 흔히들 말한다.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건 작은 사랑인지도 모른다.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큰 사랑이 아닐까. 사랑의 본질이 그렇다. 사랑은 함부로 변명하지 않는다. 사랑은 순간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이리저리 돌려 말하거나 방패막이가 될 만한 부차적인 이유를 내세우지 않는다. 사랑은, 핑계를 댈 시간에 둘 사이를 가로막는 문턱을 넘어가며 서로에게 향한다. p45 음식을 맛보며 과거를 떠올린다는 건, 그 음식 자체가 그리운 게 아니라 함께 먹었던 사람과 분위기를 그리워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운 맛은, 그리운 기억을 호출한다. p227 우린 새로운 걸 손에 넣기 위해 부단히 애쓰며 살아간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무작정 부여잡기 위해 애..
[책 이야기] 앵무새 죽이기 - 하퍼리 p65 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야.」 「네?」 「말하자면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다니는 거지.」 p173 우리들에게 공기총을 사주셨을 때 아빠는 총 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잭 삼촌이 기본적인 사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삼촌 말씀에 따르면 아빠는 총에 관심이 없으시다는 거였지요. 어느 날 아빠가 젬 오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네가 뒷마당에 나가 깡통이나 쏘았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새들도 쏘게 되겠지. 맛힐 수만 있다면 쏘고 싶은 만큼 어치새를 모두 쏘아도 된다. 하지만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라.」 어떤 것을 하면 죄가 된다고 아빠가 말씀하시는 걸 ..
[책 이야기] 김대식의 빅퀘스천 - 김대식 p27 시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인류의 모든 전설과 신화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떠나는 자에게는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유 없이 떠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바로 헤어짐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세상과 이별한 자에게는 도전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성숙이다. 떠남을 통해 성숙한 자는 다시 익숙한 세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자는 더 이상 떠나기 전의 그 사람이 아니다. 그것이 귀향이다. 캠벨은 이렇게 인류의 모든 스토리들이 헤어짐, 성숙, 그리고 귀향으로 이뤄진다고, 이 과정이야말로 인류 공통의 '단일신화'라고 이야기 한다. p43 인생을 후회 없이 잘살아야 할 논리적인 의무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못 산 인생보다는 제대로..
[책 이야기] 7년의 밤 - 정유정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해 파멸의 질주를 멈출 수 없었던 한 사내의 이야기. 딸의 복수를 꿈꾸는 남자와 아들의 목숨을 지키려는 남자. 한 남자의 딸, 자신의 아내, 마을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형수의 아들이 겪는 이야기. p28 나는 카메라플래시를 받으며 서 있었던 열두 살 이래로 허둥댄 적이 없다. 소년분류심사원에 다녀온 후부턴 분노하지도 않는다. 누군가 호감을 표해와도 관계에 대한 기대를 품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다. 안다. 놀라면 허둥대야 정상이다. 모욕당하면 분노하는 게 건강한 반응이다. 호감을 받으면 돌려주는 게 인간적 도리다. 내 또래 아이들은 대부분 그렇게 산다. 아저씨는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 문장에서 '그렇게'를 떼어내라고 대꾸한다. 나도 살..
[책 이야기] 이동진 독서법 - 이동진 팟캐스트 빨간책방을 통해 알게 된 이동진 영화평론가. 말도 잘하고 지식도 풍부하며, 이야기의 줄거리도 잘 파악하고 전달해주는 이동진님은 어떤 독서를 하는지 궁금했다. 그는 깊이보다는 넓이를 위한 독서를 해야한다고 하며 그 넓이의 독서를 했을 때 깊이도 깊어진다고 한다. p22 어떤 일이라는 건 어떤 단계에 가기까지 전혀 효과가 없는 듯 보여요. 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면 효과가 확 드러나는 순간이 오죠. 양이 마침내 질로 전환되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그게 독서의 효능, 또는 독서의 재미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책 한 권 읽은 것으로 독서의 재미가 바로 얻어지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어느 단계에 올라가면 책만큼 재미있는 게 없어요. 그 재미가 한 번에, 단숨에 얻어지는 게 아니어서 더욱 의미..
[책 이야기] 위험한 비너스 - 히가시노 게이고 p66 이 아이는 천재라고 모두가 말했다. 그런 말을 듣고 반색하지 않을 부모는 없다. 야스하루도 데이코도 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이른 시기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게 해준 것이 주효했다고 생각했을 게 틀림없다. 다만 야스하루는 "천재는 아니야"라고 못을 박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천재란 이런 것이 아니지. 세계를 바꿔버릴 만한 것을 가진 게 아니라면 천재라고 할 수 없어. 아키토는 기껏해야 수재겠지." 그리고 그 정도면 돼, 라고 말을 이었다. "천재란 행복해질 수 없으니까." p355 "괜찮아요. 어떤 일에나 순서라는 게 필요하니까요." "순서?" "어떤 일이 얼어나든 결코 후회하지 않기 위한 순서.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열심히 하고 있어요. 어쩌면 아키토씨의 행방을 밝혀내는 쪽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