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애프터 다크 - 무라카미 하루키
p202 그녀는 말한다. "그래서 생각하는 건데, 인간은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사는 게 아닐까? 그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기억인지 아닌지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아. 그냥 연료야. 신문 광고지가 됐는, 철학책이 됐든, 야한 화보사진이 됐든, 만 엔짜리 지페 다발이 됐든, 불을 지필 때는 그냥 종이쪼가리잖아? 불은 '오오, 이건 칸트잖아'라든지 '이건 요미우리 신문 석간이군'이라든지 '가슴 끝내주네'라든지 생각하면서 타는 게 아니야. 불 입장에선 전부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해. 그거랑 같은 거야. 소중한 기억도, 별로 소중하지 않은 기억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억도, 전부 공평하게 그냥 연료." 고오로기는 자신의 말에 대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말을 잇는다. "그래서 말이지,..
[책 이야기] 흰 - 한강
소금, 눈, 얼음, 파도, 백목련, 흰새, 수의... 흰 것에 대한 이야기. p15누군가가-아마 그동안 이 집에 세들었던 사람들 중 하나가-송곳 같은 날카로운 것으로 구 문의 표면을 긁어 숫자를 기입해놓았다. 획순을 따라 나는 곰곰이 들여다보았다. 세 뼘 크기의 커다랗고 각진 3. 그보다 작지만 여러 번 겹쳐 굵게 그어 3보다 눈에 먼저 들어오는 0. 마지막으로 가장 깊게, 온힘을 다해 길게 긁어놓은 1. 난폭한 직선과 곡선들의 상처를 따라 검붉은 녹물이 번지고 흘러내려 오래된 핏자국처럼 굳어 있었다. 난 아무것도 아끼지 않아. 내가 사는 곳, 매일 여닫는 문, 빌어먹을 내 삶을 아끼지 않아, 이를 악문 그 숫자들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그것이 내가 얻으려 하는 방, 그 겨울부터 지내려 하는 방의 문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