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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최진영 나는 기차가 뒤로 달리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기차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달린다. 하지만 버스는 앞뒤로 움직인다. 정말 집을 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라면 무겁고 긴 기차를 타야 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을 까먹을 만큼 아주 멀리 가야 한다. 가볍고 짧고 후진을 잘하는데다가 우리집 앞을 지나가고 중간에 내릴 수도 있는 버스는 타나 마나다. 버스는 떠나려는 마음을 고무줄처럼 당겼다가 확 놓아버리고 만다. 나는 가짜엄마가 백 번 넘게 나를 굶기는 것보다 집을 완전히 나가지 않고 자꾸만 돌아오는 게 더 싫었다. 가짜엄마가 가짜가출을 많이 할수록 가짜아빠의 행패는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만큼 잦아졌다. 나는 내 가짜가족이 갈기갈기 찢어진 종이처럼 각자의 바람을 따라 멀리 날아가길 바랐다. 돌아보지도 ..
[책 이야기] 여자 없는 남자들 - 무라카미 하루키 구리야 에리카는 에어컨 바람에 일렁일렁 흔들리는 양초 불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나는 자주 똑같은 꿈을 꿔. 나와 아키가 배에 타고 있어. 기나긴 항해를 하는 커다란 배야. 우리는 단둘이 작은 선실에 있고, 밤늦은 시간이라 둥근 창 밖으로 보름달이 보여. 그런데 그 달은 투명하고 깨끗한 얼음으로 만들어졌어. 아래 절반은 바다에 잠겨 있고. '저건 달처럼 보이지만 실은 얼음으로 되어 있고, 두께는 한 이십 센티미터쯤이야.' 아키가 내게 알려줘. '그래서 아침이 와서 해가 뜨면 녹아버려.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동안 잘 봐두는 게 좋아.' 그런 꿈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꿨어. 무척 아름다운 꿈이야. 언제나 똑같은 달. 두께는 언제나 이십 센티미터. 아래 절반은 바다에 잠겨 있어. 나는 ..
[책 이야기] 1cm - 김은주 때론 혈액형보다 귤 까는 습관이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어쩌다 그는 혈액형을 맹신하게 되었을까? 어쩌다 그녀는 커피에 약간의 소금을 넣어 마시는 취향을 갖게 되었을까? 어쩌다 그는 담뱃갑에마저 자기 이름을 써놓는 버릇을 갖게 되었을까? 어쩌다 그녀는 줄무늬 스타킹에 줄무늬 치마 줄무늬 스커트가 환상적인 매치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이해할 수 없는 버릇, 취향, 어떤 성격은 그의, 그녀의 스토리를 듣는 순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놀부 이야기에 놀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스토리가 덧붙여졌다면 그는 사람들로부터 이해받았을지 모른다. 이해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슬픈 영화도 팝콘과 콜라와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영화에서의 슬픔과 절..
[책 이야기] 시크릿 - 론다 번 서양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꽤 많은 사람이 성공하려고 아주 애를 쓴다. 멋진 집과, 사업과, 기타 온갖 외적인 것들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이런 외형적인 것을 얻는다고 정말로 원하는 것, 즉 행복을 얻는다는 보장은 없다. 사람들은 이런 외적인 것들이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믿고 그것을 추구하지만,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방식이다. 당신은 내면의 기쁨, 평화, 비전을 먼저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외적인 것들이 찾아올 것이다. - 마시 시모프 스스로 자신의 해결책이 되어라. 남한테 "부디 나를 데려가세요. 그리고 내게 더 많이 주세요"라고 말하지 마라. 대신 스스로 자신에게 더 많이 베풀어라. 시간을 내서 자신에게 베풀고, 자신을 가득 채워서 남들에게 베풀 수 있게 하라. - 존 그레..
[책 이야기] 소리나는 모래 위를 걷는 개 - 게키단 히토리 우리의 사랑은 일방통행이다. 아무리 아이돌을 사랑해도 팬이라는 벽을 넘어서 한 사람의 남자로서 사랑받는 일은 결코 없다. 나는 그 점에 대해서 현실도피하지 않고 순순히 인정한다. 아이돌은 나의 사랑에 대답을 해주지는 않지만, 반대로 내 사랑을 거절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일반 여성을 사랑할 때와 크게 다른 점이다. "관심 없어요."라고도 "딴 데 가서 알아보세요."라고도 하지 않고 아이돌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사랑을 받아준다. 우리는 분명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걸 겁내지 않는다. 우리의 사랑은 가로막는 브레이크가 없다. 매장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가게에 출입하는 세련된 젊은 남녀를 눈앞에서 보니 푸석푸석한 머리와 헐렁한 차림새를 한 내가 올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욕탕에서 알몸이 되..
[책 이야기] 하악하악 - 이외수 자기가 마음대로 돈을 그려서 무제한으로 쓸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그대가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은? 거리에서 행색이 남루한 사내 하나가 당신을 붙잡고 이틀을 굶었으니 밥 한 끼만 먹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애원했다. 당신은 그를 불쌍히 여겨 수중에 있던 삼만 원을 모두 털어주었다. 그런데 사내가 그 돈으로 회칼을 구입해서 강도살인을 저질렀다. 당신이 사내에게 베푼 것은 선행일까 악행일까? 길을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길을 가던 내가 잘못이냐 거기 있던 돌이 잘못이냐. 넘어진 사실을 좋은 경험으로 받아들이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인생길을 가다가 넘어졌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당신이 길을 가면서 같은 방식으로 넘어지기를 반복한다면 분명히 잘못은 당신에게 있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울어야..
[책 이야기] 미 비포 유 - 조조 모예스 "그러면 원하는 게 뭐예요?" "내가 원하는 뭐요?" "인생에서?" 나는 눈을 껌벅거렸다. "그건 좀 심오하네요, 그렇죠?" "그냥 전반적으로요. 정신분석을 해보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냥, 하고 싶은 게 뭐예요? 결혼?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거? 꿈꾸는 직업은? 세계여행?" 한참 동안 아무말도 오가지 않았다. 대답을 입 밖에 내어 말하기도 전부터 나는 그가 실망할 걸 알고 있었다. "몰라요. 진짜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나는 그의 허벅지를 내려다보고 주변의 마룻바닥을 살폈다. 파손된 물건들 사이에서 하필이면 그와 알리샤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일그러진 은제 액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물끄러미 사진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길을 들어 그의 눈을 보았다. 그 몇 초는 내가 기억..
[책 이야기] 배꼽철학 - 임숙경 사랑이 있다면, 정열적인 사랑이, 헌신적인 사랑이, 생명까지라도 바칠 수 있는 그런 사랑이 있다면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헌신적이지도, 정열적이지도 못하다. 그들은 그저 미적지근하게 살아가고 있을 뿐, 목숨을 바쳐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에는 불이, 새파랗게 타오르는 생명의 불이 없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얼마나 크게 작용될지 모른다는 것을, 보통 사람들은 좀처럼 알지 못한다. 큰 나무는 하늘에 가깝고, 작은 나무는 땅에 가깝다. 큰 나무는 큼에 기뻐하고, 작은 나무는 작음에 기뻐한다. 이렇듯 만물은, 아무리 하찮은 미물이라도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가에 앉아서 고기를 탐하느니 돌아와 그물을 짜라. 어떤 자리에서 남의 지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