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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책책/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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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무라카미 하루키 만약 당신이 진정한 예술이나 문학을 원한다면 그리스 사람이 쓴 책을 읽으면 된다. 참다운 예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노예 제도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예가 밭을 갈고 식사를 준비하고 배를 젓는 동안, 시민은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시작에 전념하고 수학과 씨름했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모두가 잠든 새벽 세 시에 부엌의 냉장고를 뒤지는 사람은 이 정도의 글밖에는 쓸 수 없다. 그게 바로 나다. 누구나 쿨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시절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나는 마음속의 생각을 절반만 입 밖으로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유는 잊어버렸지만 나는 몇 년 동안 그 결심을 실행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나 자신이 생각한 것을 절반밖에 얘기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사실을 발..
[책 이야기]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 - 라울 따뷔랭 만약에 자전거의 변속이나 토 클립(페달에 달린 발 끼우개), 베어링, 체인 스프로켓(톱니바퀴), 튜브, 공기 타이어, 세미 타이어 또는 관 모양의 경주용 타이어 등등에 정통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분명 생 세롱의 자전거포 주인 라울 따뷔랭이었다. 갖은 삐걱거림, 온갖 새는 소리들, 가장 고치기 까다로운 고장들, 그토록 세심한 손질 등등, 라울 따뷔랭의 실력에 대해서는 흠을 잡으려야 잡을 구석이 없었다. 그의 명성이 어찌나 자자했던지 이 지역에서는 이제 자전거라는 말을 더 이상 쓰지 않고, 이라는 말로 대신하게 되었다. 따뷔랭의 창조자 라울 자신은 자기 명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살고 있었다. 사람 자체와 그의 겉모양 사이에 잘못 분배된 무게가, 그런대로 균형 잡힌 이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그것..
[책 이야기] 돌아와 앉은 오후 네시 - 권오영 무릇 사람이 음식을 섭취하는 데에는 이유와 목적이 있다. 물론 '식욕'이라는 지극히 본능적인 행위이긴 하지만 그 본능에도 '맛'과 '건강'이라는 이유와 목적이 엄연히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술도 하나의 음식이지만 다른 음식과는 너무도 다른게 또한 이 술이다. 기뻐도 한잔 슬퍼도 한잔 이래도 한잔 저래도 한잔, 그렇듯 어울리지 않는 곳이 없는 술이야말로 다른 음식이 따르지 못할 전천후 음식이니 말이다. 취하지 않고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마취 없이 대수술을 받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을. 세상사는 참 묘하다. 에디슨이나 노벨 같은 과학자가 생활에 편리하고자 발명한 것들이 전쟁에 사용되었고, 전쟁이 끝나자 그 기술들은 인간의 생활용품에 투자된다. 에어컨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처음 에어컨을 만든 사..
[책 이야기] 사라진 소녀들 - 안드레아스 빙켈만 사라는 등을 대고 누워 부드러운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고 팔과 손도 이불 속에 감춘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가능한 얕은 숨을 쉬며 눈을 감고 온 신경을 귀에 집중했다. 이제 복도가 아주 조용해져서 그 어떤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용했다. 그런데 누군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계속 남아 있었다. 사라의 손은 또다시 침대 위 천장에 매달려 있는 벨을 향했다. 그러나 벨을 잡고 만지작거릴 뿐 누르지는 않았다. 벨이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조금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또다시 랑에 선생님을 호출하기에는 너무 창피했다. 사라가 가장 좋아하는 랑에 선생님은 사라가 둘러댄 것처럼 그렇게 심각한 두통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눈치챘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사라는 눈을 감고 이불..
[책 이야기] 바이 코리아 - 김진명 "나는 이 프로젝트를 가지고 수십 번이나 정부에 연구비 신청을 했소. 그동안에도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금을 동원했고. 집도 팔고 아는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몇십만 원도 빌렸소. 하지만 그것 가지고 연구비가 되겠소?" "여기 미국에 오게 된 것은 그럼......" "곧 떼돈 되는 줄 알고 돈을 빌려주었던 자들이 있었소. 처음엔 좋은 일에 쓰는 거니 갚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소." 말을 하다 말고 나 박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큰 연구가 주식투자하듯 되는 줄 아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과학자가 그런 돈을 쓰게 만드는 한국 사회의 풍토요. 과학기술만이 살 길이니 어쩌니 하고 떠들어대지만 한국 사회의 실상은 그렇지 않잖소." "음." 의림은 침통한 심정을 가눌 수 없었다. "연구를 위해 돈을 ..
[책 이야기] 미생 - 윤태호 1권 : 착수 #1 저 불빛들 중 하나를 책임지게. 한 명 한 명의 불빛이 모여 우리의 밤을 밝히는 거니까. #2 턱걸이를 만만히 보고 매달려보면 알게 돼. 내 몸이 얼마나 무거운지. 현실에 던져져보면 알게 돼. 내 삶이 얼마나 버거운지. 2권 : 도전 #1 어떤 바둑을 졌을 때보다 처참했다. 다 자기만의 바둑이 있는 건데... 내가 뭐라고, 나 따위가 어디서 감히! 비루한 훈수질이냐. #2 그냥 두는 수라는 건 '우연'하게 둔 수인데 그래서는 이겨도 져도 배울 게 없어진단다. '우연'은 기대하는 게 아니라 준비가 끝난 사람에게 오는 선물 같은 거니까. #3 사람의 인상은 찰나에 결정된다던가. 하물며 3분이면, 사기꾼이 성자로 바뀌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4 말이라는 게 글과 달라 그 장소의 공기를 장악..
[책 이야기] 파라다이스 2 - 베르나르 베르베르 어떤 상표의 제품을 구입한다는 건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일이었다. 또 그건 역으로 보면, 자기가 무엇이 아닌지를 나타내 보이는 일이기도 했다. 우리는 코카콜라 아니면 펩시콜라다. 우리는 나이키 아니면 아디다스다. 우리는 마이크로소프트 아니면 애플이다. 우리는 맥도날드 아니면 버거킹이다. 우리는 르노 아니면 푸조다. 우리는 혼다 아니면 도요타다. 우리는 BMW 아니면 메르세데스다. 우리는 야후 아니면 구글이다. 우리는 디오르 아니면 샤넬이다. 우리는 SK 아니면 KT다...... 그리고 이렇게 어느 상표에 대해 갖는 호감이나 반감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부족이 형성된다. 로고는 국기보다 예뻤다. 광고 노래는 공식 국가보다 멋지고 짧았다. 소비자들은 스포츠나 컴퓨터, 유명 의류 디자이너 이름 등의 상표가 ..
[책 이야기]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 하야마 아마리 "안 돼!" 너무 순식간이라 손 쓸 틈도 없이 딸기가 바닥에 뒹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쑥 뻗었다. '바로 주우면 먹을 수 있어.' 딸기를 집어 들고 입으로 후후 불다 보니 크림 범벅이 된 딸기에 긴 머리카락 한 올이 달라붙어 있다. '괜찮아, 괜찮아. 씻으면 돼.' 나는 스스로 최면을 걸며 싱크대로 달려갔다. 허리를 구부리고 수도꼭지를 트는 순간, 갑자기 마음의 끈이 끊어졌다. '뭐 하는 거니, 너......' 스테인리스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 더미에 내 얼굴이 비쳤다. 바닥에 떨어져 더러워진 딸기를 기어코 주워 먹으려는 나, 뒤룩뒤룩 살 찐 서른 즈음의 외톨박이 여자, 그것이 지금의 나였다. 나는 스물아홉이다. 나는 뚱뚱하고 못생겼다. 나는 혼자다. 나는 취미도, 특기도 없다. 나는 매일 벌벌 떨..